SANGEUN다꾸의 추억

스보헴
2020-12-17
조회수 268

초등학교 때 숙제로 맨날 검사 받던 일기장이나 알림장이 아닌, 내 맘대로 쓰고 꾸미기 위해 마련한 다이어리. 아마도 중학교 때 처음 사지 않았나 싶어요. 저는 중3 때 사용했던 다이어리를 아직도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 이 글을 읽으시는 분 중엔 이 다이어리와 동갑내기거나 더 어리신 분들도 있을 거예요. 그만큼 오래된 다이어리인데, 처음 샀을 때 손에 쥐었던 감촉과 냄새를 아직도 기억해요. 분홍색 인조가죽 커버는 부드러웠고 새 종이와 접착제 냄새가 섞인 달큼한 풋내가 인상적이었어요. 



중학교 3학년 12월, 자라나는 씨네필의 다이어리



영화는 리처드 3세, 투웡푸, 스위치, 신부의 아버지 2, 미션 임파서블,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 룸메이트, 우리들만의 집을 보았네요.

또 한편으로는 K-리그를 보기 시작한 어린 축덕이기도 해서 응원하던 축구팀 경기 결과와 국대 경기 결과를 기록해 두기도 했습니다.



닥치는 대로 영화를 볼 때라 본 영화의 제목과 짧은 감상을 기록해 두는 것은 중요한 일과 중 하나였습니다. 극장에서 본 영화, 비디오 대여점에서 빌려서 본 영화, KBS ‘주말의 명화’에서 본 영화 등 한 편도 빼놓지 않고 기록해두었어요. 아직 영화 취향이란 게 제대로 잡히지 않았던 시절이라, 코미디, 액션, 드라마, 판타지, 셰익스피어 원작 작품까지 가리지 않고 보았어요. 12월 14일엔 시험을 잘 봐서 기뻤던 것 같은데 또 뭔가 좋은 일이 있었나 봐요. 그렇게 즐거웠던 일이 무엇이었는지 자세히 적어놓지 않아 이제는 알 수 없다는 게 조금 아쉬워요. 그래도 영화와 축구만으로 마냥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다는 게 새로워요.

           



고등학교 2학년 10월, 자라나는 락덕후의 다이어리


당시 좋아하던 밴드 멤버들의 생일을 기록해 두었으며 여전히 수원 블루윙스의 팬이었네요. 중간고사 시험공부 계획을 착실하게 세우고 시험이 끝난 후엔 아트 선재로 바스키아를 보러 갔어요.



다꾸에 가장 진심이었던 시절이 아마 고등학생 때일 거에요. 용돈으로 펜과 스티커를 사모으던 시절. 한 칸 한 칸 펜을 바꿔가며 가장 예쁜 글씨체로 스케줄을 기록해두고 스티커도 깔끔하게 붙여두었습니다. 이 다이어리는 임시로 쓰고 있던 거라 새로운 다이어리를 꾸밀 때 필요한 준비물을 써두기도 했네요. 혼자 쓰던 다이어리 뿐 아니라 절친과 교환일기를 쓰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 교환일기 역시 아직도 가지고 있는데, 사진을 찍어볼까 하고 펼쳐보았다가 파도처럼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흐린 눈이 되어 다시 봉인하였답니다.




대학교 4학년 5월, 과제에 쩌든 학점 노예의 다이어리


과제가 너무 많아서 괴롭다. 살려달라는 등의 고통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대학을 다니면서 오히려 마음의 여유가 없어졌던 것 같아요. 다이어리는 말 그대로 과제와 할 일들이 잔뜩 적힌 플래너로만 사용했습니다. 화려한 펜들은 모두 사라지고 샤프로 끄적였고요. 그래도 문화생활을 틈틈이 해서 라이너스 담요의 공연과 매튜 본의 호두까기 인형을 보러 가기도 했어요.




체코 유학 시절, 자취와 학업의 고충이 담긴 다이어리


 2009년 1월 6일에는 보일러가 사망하고 집주인과는 연락되지 않고 있었네요. ‘끝내줌’이라는 표현을 보면 무언가 시니컬한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체코에서 학교 다니던 시절의 다이어리는 학교 과제와 스케줄, 가계부, 자취 살림 내용이 한국어, 영어, 체코어로 뒤죽박죽 쓰여있어요. 더욱 생존형에 가까워진 다이어리지요.

대학생과 유학생 시절엔 그림을 그리는 스케치북을 항상 가지고 다니던 시기라 다이어리는 실용적 용도로만 사용했어요. 그리고 손으로 쓰던 다이어리의 역사는 2012년에 아이패드를 득템하면서 끝나게 됩니다.



2020년의 다꾸

  


처음 제작해 본 홀리데이 에디션 한정판 마스킹 테이프



이번에 마스킹 테이프를 만들며 요새 유행하는 다꾸는 무엇인가 찾아보았어요. 필기구와 문구들이 20세기에 비해 풍족하고 다양해지면서 2020년의 다꾸는 단순한 꾸미기를 넘어서 아트북의 영역으로 향하고 있더라구요.


자신의 일정이나 취향을 정성껏 정리하는 과정은 평범한 일상을 특별하게 만드는 리추얼이 될 수 있어요.


다이어리 꾸미기를 하려면 그 페이지를 어떻게 꾸밀까 하는 전체적인 계획부터 전반적인 레이아웃과 사용할 펜의 색, 굵기, 종이에 썼을 때 잉크가 번지는 정도가 적절한지 판단해야 합니다. 또 내가 써넣을 내용과 어울리는 분위기의 스티커나 마스킹테이프도 골라야 하죠. 생각보다 종합적인 사고가 필요한 작업이고, 세심한 디테일을 살리기 위해선 시간도 꽤 든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학업 성취, 업무 효율을 위해서가 아닌, 오로지 나만을 위해 이렇게 정성들인 시간을 보낼 일은 많지 않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예전 다이어리를 꺼내보면 평범한 일상을 적은 글자 하나하나가 예쁜 추억이 되어 종이 위에 남아있는 걸 느낄 수 있어요.



12월 베스트 후기 선물인 노트 샘플



‘자신만의 방식으로 인생을 아름답게 만드는 분들께 영감을 선사하겠다’는 스보헴의 브랜드 철학처럼, 저도 일상을 조금 더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다이어리 꾸미기에 다시 도전해 보고자 합니다. 마침 12월 월간 베스트 후기 선물로 드릴 스보헴 노트 샘플이 도착하기도 했고요. 한참 다꾸를 하던 시절보다 나이가 두 배 정도 많아진 지금 하는 다꾸는 또 어떻게 다를지 궁금하기도 해요. 열심히 꾸민 다이어리는 새해 첫째 주 매거진에서 공개할게요. 그때까지 건강 조심하시고, 따듯한 12월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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