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RA식물힐러를 꿈꾸는 식물킬러

스보헴
2020-12-31
조회수 137


식물과 함께할 때에만 느낄 수 있는 조용하고도 싱그러운 평화의 기쁨이 있어요. 

그런 기쁨은 아주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체득한 것이었습니다.

봄철 꽃봉오리를 맺는 작은 가지 들을 볼 때 꽃처럼 부풀어 오르는 마음.

산책로의 키 큰 나무들 사이를 걸을 때 나무 꼭대기까지 시선을 옮기다 보면 쭉 뻗은 나무처럼 반듯하게 펴지는 마음.

동네 화단에 핀 코스모스가 산들산들 바람에 일렁이는 모습에 가벼워지는 마음.

나이와 관계없이, 누구나 식물과 함께 할 때 느껴본 감정일 거에요. 


식물을 잘 키우는 손을 두고 그린썸Greenthumb(초록엄지)이라고 한다죠. 

저는 그린썸이 되고 싶었습니다. 나이가 들어 삶이 복잡해질수록 내 시선이 닿는 공간 한 켠에 이런 초록 평화를 들여놓고 싶다는 생각을 점점 더 자주 하게 되었어요. 


하지만 저는 식물 킬러 였습니다.


잘 안 죽는다, 튼튼하다, 강인하다고 소문난 식물들만 골라서 키워보기도 했지만 그들도 모두 제 손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초록이 갈색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낙담한 게 몇번인지... 잘 키워보겠다고 데려온 아이를 바싹 말려 내보낼 때마다 자괴감이 찾아왔습니다. 

이 정도면 그린썸이 아닌 데스death썸이라고 해도 될 수준이었어요. 과습과 사막의 사이에 균형을 찾기만 하면 될 것 같은데, 그 균형 찾기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차라리 식물이 ‘나 목말라’ 또는 ‘물이 너무 많아!’라고 말해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말없는 식물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 저에겐 너무 어려웠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웠으나, 역시 제 손에서 살아남지 못했던 피나타 라벤더와 아이비, 유칼립투스입니다. 



그렇게 10년 넘게 수많은 식물들을 죽여왔던 저는 결국 식물을 키우지 말자고 결심했습니다.

'난 너무 바쁘니까'라는 자기합리화를 하면서요.   


그러다 수경재배를 만났습니다.

요리를 즐겨하는 남편은 결혼 전부터 집안에서 바질과 파슬리 등을 키웠습니다. 한 때는 방의 절반이 우거진 숲속같을 정도였어요.  LED의 보랏빛 등 아래에서 갖가지 허브들이 연금술사의 식물처럼 푸르게 빛나고 있었지요.


남편의 우거진 허브들



제이미 올리버처럼 식사준비를 할 때 집에 있는 허브를 한 움큼 뜯어오는 생활이라니, 언젠가 꼭 해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이루는구나 싶었어요. 직접 키운 바질로 만든 바질페스토를 만들어 먹을 때의 뿌듯함이란!

 

게다가 수경재배는 여과기로 산소를 공급해 뿌리가 썩을 일 없고, 물에 양분을 넣어주니 흙갈이나 영양제 투입 걱정도 없고, LED 등으로 광원을 제공하니 채광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지요. 오로지 통풍만 신경 쓰면 된다는 건 정말 솔깃한 일이었어요. 저는 수경재배로 세이지와 애플민트를 키우기 시작했고, 이 허브들은 금새 덤불을 이루었습니다. 그해 겨울에는 레몬과 꿀을 넣고 세이지 청을 만들어 차를 타 마셨죠.




감격에 겨워 찍은 세이지.



무성한 애플민트를 수확하는 기쁨.



자신감이 붙은 저는 꿈에 부풀어 크리스마스 트리를 진짜 나무로 하기로 했습니다. 오랜 로망의 실현을 위해 직접 농장에 가서 실어오는 수고도 마다않고 예쁜 가문비나무를 데려왔어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가문비나무는 세상을 떠났습니다ㅜㅜ 

통풍 부족과 과습이 원인이었어요. 흙 상태에 따라 물의 양을 조절하는 건 기본인데 독일의 습한 숲에서 사는 나무니 물이 많이 필요할 거라 착각하고 아낌없이 부은 제 잘못이었습니다. 

처음으로 고른 크리스마스 트리이고 직접 산지에서 고른 만큼 무척 아름다운 가지를 가진 아이였기에 죄책감은 더 컸습니다. 

'다 시든 것 같지만 주기적으로 물을 주고 관리하면 다시 잎이 돋지 않을까?' 하는 부질없는 희망에 기대, 빈사상태인 아이를 소생시키려고 이것 저것 많이 해봤지만 6개월이 지나자 완전히 갈색으로 변해 빼빼 마른 모습에 결국은 보내주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론 수경재배로 먹을 것만 키우기로 했어요. 




그는 완벽한 크리스마스 트리였죠.



이렇게나 아름다웠답니다.



그런데... 창업을 하면 화분 선물을 많이 받잖아요? 제 의지와 상관없이 선물로 화분이 막 들어오는 거예요...!

스보헴의 탄생을 축하하는 의미로 생장을 상징하는 식물을 선물해준 것이기에 이 화분들마저 죽인다면 스보헴도 잘 안 될 것 같다는 망상에 사로잡히게 되었어요.


과거 경험으로 과습보다는 모자랄 때 물을 주는 게 낫다는 걸 깨달았기에 좀 시드는 것 같으면 그때그때 샤워시켜주는 정도로만 물을 줬어요. 시들시들하다 물을 먹고 살아나기를 몇 번, 다행히 이 화분들은 현재까지 무사합니다. 다만 요즘 다시 시들시들해서 보니 분갈이가 필요한 시점인 것 같아요. 그래서 분갈이라는 새로운 도전이 추가되었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화분들이 살아나자 욕심이 생긴 저는 커피나무 묘목을 들이고 말았습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카피가 머릿속을 스치지만 인생이란 다 그런 게 아니겠어요. 하지만 들어보세요. 강릉 테라로사에서 본 커피나무가 얼마나 예뻤냐면요, 햇살 아래 윤기로 반짝이는 잎이 정말 보석을 깎아 만든 것 같았어요. 




강릉 테라로사에서 반짝반짝 빛나던 커피나무



강원도를 함께 여행한 저의 커피묘목



그렇게 들인 커피묘목은 2년이 되어가는 지금, 제법 나무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키울 때 잎을 적당히 쳐야 한다고 하는데 이렇게 예쁜 잎을 어떻게 잘라내! 하면서 못하고 있어요. 갈 길이 멉니다.




잘라줘야 한다는데 어떻게 자르죠? 이렇게 예쁜데...


그래도 이렇게 하나, 둘 성공사례를 만들어가는 게 기분이 정말 좋아요.

지그시 바라보다 속도를 맞춰주니 그에 호응하듯 나날이 예뻐지는 모습을 보여주니 보람이 남다릅니다. 최근에는 정기배송 받은 꽃이 남아 물꽂이를 해두었는데 매일 물을 갈아주자 물속에서 잎이 나더니 아주 작게 뿌리가 나기 시작한 거 있죠. 나중에 뿌리가 더 많이 나면 화분에 옮겨줄 생각에 벌써부터 설레입니다. 




한달 전에 사왔던 꽃인데, 맨 밑에서 아주 작게 뿌리가 나오고 있어요.


 바쁘다는 핑계로 식물을 돌보지 않았던 지난 날의 저를 돌이켜보면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도 잘 돌보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때보다 더 바쁜 요즘 같은 시기엔 더더욱 심혈을 기울이고 있어요.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로 힘이 들 때 식물을 돌보면서 흙을 만지고, 물을 주고, 잎을 정리하면 어느새 산란했던 마음이 고요해지고 내면에 평화가 찾아오더라구요.

   

아직 가지치기와 분갈이, 삽목의 과제가 남아있지만 내 삶을 돌본다 생각하고 열심히 도전해보려고 합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식물킬러이신가요? 저도 해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식물들이 주는 초록 평화를 집에서도 한번 느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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