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NGJOO나를 둘러싼 것들이 너무 무겁게 느껴질 때

스보헴
2021-01-14
조회수 128



‘산’이라는 단어를 보면  눈살을 찌푸렸던 때가 있었어요.
어릴 적 명절마다 벌초하러 간 게 머릿속에 ‘산=벌초=귀찮다’ 라는 공식을 만들었거든요. 저희 선산은 벌초를 한번 할 때마다 그 양이 엄청났어요. 트럭 몇 대를 가득 채울만큼 쌓인 풀더미에서 나는 냄새란 정말이지.. 100미터 넘게 떨어져있어도 바람이 불면 텁텁하고 씁쓸한 풀내음이 같이 밀려왔던 기억이 나요. 

 

새벽 6시부터 올랐던 한라산. 

산에 대한 인상이 바뀐 건 30대가 되고 나서였어요.
우연한 기회로 친한 동생과 함께 북한산을 올랐는데, 나무가 빽빽한 등산로를 걷다가 문득 올려다본 하늘에 ‘아무 것도 없다’는 걸 깨달은 순간 해방감을 느꼈어요. 

전신의 감각이 찬물을 맞은 듯 깨어나는 그 느낌. 단순히 높이 올라왔다는 성취감이 아니라 ‘시야를 가리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데에서 오는 쾌감은 글로 온전히 옮기기 어렵네요. 

산 아래에서는 하늘을 올려다볼 때 늘 삐죽삐죽 튀어나온 건물이 시야를 방해하잖아요.
이루 말할 수 없는 찬란한 색으로 물든 하늘을 보고 감탄하다가도 그 광경 일부를 가리고 있는 건물을 보고 아쉬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아침햇살이 숲에 스며드는 모습은 언제 봐도 질리지 않아요.


 물론 산에서도 일정 지점에 다다르기 전까지는 하늘을 온전히 감상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나무와 흙으로 이루어진 곳을 묵묵히 걸으면 사각형의 콘크리트 안에서 먹고, 마시고, 자고, 일하면서 소모했던 활력들이 다시 회복되는 걸 느낄 수 있어요.

그러다가 탁 트인 하늘을 만나고, 멀리 있는 건물을 보면 너무 작아 보여서 놀라요. 도심 안에서 올려다보면 다 무척이나 크고 높은 건물들인데... 12억 짜리 아파트가, 100억 짜리 빌딩이 산 위에서 보니까 별거 아닌 거예요. 


몇년 전 여름에 올라갔던 북한산


내가 삶의 대부분을 소진하는 곳이 전체에서 보면 실은 엄청나게 작은 곳이었다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 집에서, 직장에서 몇날 며칠 끌어안고 있던 수많은 고민들이 갑자기 가벼워져요.
어깨에 짊어진 게 실은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는 사이즈라는 걸 깨달은 데에서 오는 해방감인 거죠. 그 느낌이 저로 하여금 자꾸 산을 오르게 만들어요.


북한산 정상 인근은 각도가 매우 가파릅니다. 의외로 20대와 외국인들도 많이 와요.


요즘 제 또래에서 등산이 유행이라고 하더라고요. 몇년 전까지만 해도 ‘아재 취향’ 혹은 ‘부장님 취향’ 으로 치부되던 등산이 새로운 트랜드가 된 건 제가 느꼈던 그런 기분을 다른 사람들도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그 어느 세대보다 치열하게 살아야하는만큼, 일상의 환기가 누구보다 절실한거겠죠.


한라산 속밭 대피소(해발 1,098m)에서 주섬주섬 다구를 꺼내 우렸던 녹차. 


작년 초, 코로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친구들과 한라산에 갔어요. 난생 처음 간 제주도, 난생 처음 간 겨울산행이었죠. 일행 중 막내가 특별히 좋은 하동 녹차를 가져온다기에, 차에 누구보다 진심이었던 저는 신이 나서 휴대용 다구를 챙겨갔답니다.

기대를 하긴 했지만, 겨울산에서 마시는 차의 맛과 향은 훨씬 더 놀라웠어요. 맑고 차가운 산 바람이 온기를 머금은 찻잎을 스쳐지나가면 산 아래와 달리 농밀하고 풍부한 향이 퍼져요. 오로지 향기 하나만으로 사람이 그렇게까지 즐거워질 수 있을줄 몰랐어요. 신선한 향이 머리를 맑게 만들어 주면서 한 모금 마시면 마음까지 씻겨지는 것 같았죠. 정말 좋았어요. 너무 좋아서 그냥 좋다는 말 밖에 할 수 없을 정도로.



해발 1500m쯤에 만났던 눈사람. 추워 보였는지 누가 목도리를 둘러주었어요.  

2월의 백록담. 장관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지칠 때면 산을 찾아요.

제 머리 위로 아무 것도 없는 산 꼭대기에 서서, 그동안 가까이에서 밖에 보지 못했던 것을 멀찍이 떨어져서 관찰하면 숨막히던 고민들이 한결 가벼워지더라구요. 


머릿속을 가득 채운 일들을 작아진 건물들만큼 줄이고, 산 위의 하늘과 청명한 공기로 마음을 채우고 나면 내 안의 고갈됐던 믿음과 확신이 다시 회복되어요.

‘자신없어.’ 또는 ‘할 수 있을까?’라는 의심은 어느새 ‘할 수 있어.’, ‘길게 보면 별일 아냐.’라는 생각으로 바뀝니다. 인생과 등산의 공통점은 움직이지 않으면 나의 위치 또한 바뀌지 않는다는 점 아닐까요. 일단 시작해서 여기까지 왔다면, 다른 일에서도 똑같이 하지 않을 이유가 없겠죠.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나를 둘러싼 모든 게 너무 무겁게 느껴질 때 가까운 산에 가보시는 걸 추천드려요. 야트막한 산부터 하나씩 정복하다보면 내가 스스로를 과소평가했구나 라는 깨달음과 함께 자신감이 붙을 거예요. 


기적같은 여정은 아무 생각 없이 내딛는 한 걸음들이 쌓여 만들어집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모두, 스보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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