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RA까미노의 맛 (1)

스보헴
2021-02-11
조회수 91


저는 어딘가에 매여있다는 기분이 들 때마다 꼭 떠오르는 곳이 있어요.

‘산티아고로 가는 길 (까미노 데 산티아고 Camino de Santiago)’ 

우리나라에서는 스페인의 까미노로 잘 알려진 곳이죠.


직접 찍은 '까미노 데 산티아고'. 공사 중인 산티아고 성당의 첨탑이 오른쪽에 보여요


‘까미노’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제 주변에는 보통 ‘무거운 짐을 지고 아픈 발로 땀흘리며 걸어가는 고생길’로 많이 알려져 있더라구요. 그래서인지 돌아와서 ‘고생했어’라는 말을 참 많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만든 추억들은 생각보다 즐거운 게 많아요.


까미노를 걷는 동안 지고 다닌 배낭과 현지에서 샀던 지팡이.



그중에서도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은 꼭 음식이 함께 했답니다.

저는 사 먹기보다 직접 요리하는 날이 더 많았고, 그때마다 혼자 먹을 양을 한참 초과해 만들었기 때문에 꼭 같이 먹을 사람들을 불러모아야 했어요. 오늘은 까미노에서 했던 요리와 요리를 통해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해볼까 해요.



부엌의 재앙, 카레 펜네


이 카레는 스페인 옛 카스티야 왕국의 수도였던 ‘부르고스’를 지나면 나오는 작은 마을‘ 오르니요스 델 까미노’ 에서 만들었어요. 



돌담이 많고 장미꽃이 핀 마을의 알베르게(순례자용 숙소)에서 시에스타를 즐기고 일어난 저는 조그만 상점에 들어가서 펜네 한 봉지와 훈제 닭고기, 양파, 마늘, 파프리카와 계란을 샀습니다.

가게 주인 할머니는 영어를, 저는 스페인어를 못 해서 식자재 이름을 스페인어로 외워간 게 천만다행이었어요. ‘우에보’ 하고 계란을 가리킨 할머니는 숫자와 금액을 적은 종이를 제 손에 들려주셨답니다.


제 카레 사건의 ost, 한번 들어보시죠


알베르게에 돌아온 저는 루이스 마리아노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우리 엄마 Maman la plus belle du monde’를 들으며 기분 좋게 요리를 시작했어요.

저녁과 내일 아침으로 먹을 카레 펜네를 만들 생각이었죠. 일행도 없으니 양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2인분이면 충분했어요. 


닭 한 마리와 계란 네 개, 그리고 엄청난 양의 펜네.


하지만 잠시 후, 제 앞엔 목표였던 2인분은 온데간데없고 6명이 넉넉히 먹을 분량의 카레 펜네가 만들어져 있었어요. 이른 저녁 아무도 없는 부엌에 혼자 서서 이틀 내내 먹어도 남을 음식을 보는 제 표정이 어땠을지 상상이 가시나요.
때마침 어떤 프랑스인 부부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지 생각하기도 싫네요. 제가 틀어놓은 노래를 휘파람으로 따라 부르는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던 것 같아요.   


“내가 닭고기 카레 펜네를 너무 많이 만들었는데, 맛보고 괜찮으면 같이 저녁식사 할래요?”


카레 펜네 1인분


흔쾌히 응한 부부는 부리나케 나가 와인을 가져왔고, 설거지와 음식쓰레기를 처리해주었습니다.

바스토뉴의 숲이 보이는 집에서 살고 어린 시절부터 친했다는 부부는 얼굴의 주름이 무색하게 생기가 넘치는 커플이었어요. 제가 설거지하는 남편을 보고 ‘좋은 남편이네요.’라고 하자 부인은 ‘그럼, 그렇고말고’ 하면서 사랑스러운듯이 버드 키스를 해주었죠. 

그 뒤로도 다른 마을에서 만날 때마다 이 둘은 늦게 도착한 저를 보면 주스를 챙겨 가져다 주거나 물집에 붙일 반창고를 나눠주곤 했어요. 

사진이 없는 게 아쉽네요. 하지만 그들의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들을 기억하고 있으니 그걸로 만족하고 있어요. 그렇게 바스토뉴 숲가에서 온, 사춘기 소년소녀같던 다정한 부부는 저에게 부드러운 카레 펜네와 함께 기억되고 있답니다.

 

6월, 해가 길어 아직 대낮같았던 저녁. 알베르게의 안뜰에서.



순대볶음 대신 초리소 볶음, 그리고 우비


그레고리안 성가를 들려주던 수도원이 있는 작은 마을


이 요리를 했던 곳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두 번째 산길이 나오기 전의 작은 마을이었어요.

순례길에서 알게 된 한국인 동생을 만나 반가웠던 저는 저녁을 해주기 위해 초리소와 채소를 샀습니다. 스페인의 매콤한 소시지 초리소를 채소와 함께 순대볶음처럼 볶고, 마침 많이 갖고 있던 딸레아딸레 파스타면으로 베지터블 파스타까지 했지요.

그렇게 저는 또 카레 펜네 사태와 똑같은 상황에 처했습니다. 그나마 이즈음엔 익숙해져서 같이 먹을 사람을 찾아 알베르게를 어슬렁거릴 여유도 생겼답니다. 때마침 종종 같이 걸었던 베네수엘라 의사 아저씨를 만났고, 그분과 같이 다니게 된 캐나다 청년도 함께 저녁 식사에 초대했어요.


같이 초리소 볶음을 먹었는데 되게 맛있었거든요. 그걸 한번 더 먹으러 가고 싶네요. 계속 생각이 나더라고요. 되게 맛있었는데. (feat. 아이유의 '대게' 사건)


식탁에 앉은 4명 중 한국인이 2명이다 보니 외국인에게 12간지에 관해 설명하기도 하고, 환경에 관심 많은 의사 아저씨가 있으니 유전자 조작 농산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트래킹이 취미인 캐나다 청년이 있으니 자연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어요. 각종 채소가 뒤섞인 스페인식 순대볶음 만큼 다채로운 이야기를 했지요.


저는 인물사진을 찍지 않았지만 같이 식사했던 베네수엘라 의사 아저씨가 사진을 찍었어요.

왼쪽부터 캐나다 청년, 한국인 동생, 저, 그리고 베네수엘라 아저씨에요.

아, 나도 그 때 만난 퍼스트 네임밖에 모르는 사람들의 사진을 간직해둘 걸, 하고 조금 후회했죠.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곧 올라갈 산에서 비를 만날 가능성이 크다는 소식을 들은 저는 마을에 하나뿐인 가게에 가서 우비를 살 예정이었어요. 그런데 어제 식사를 함께했던 한국인 동생이 아침 산책을 갔다가 돌아와선 가게가 열지 않았다는 거예요. 

까미노는 마을 규모에 따라 약국이나 상점이 하나뿐이거나 없는 경우가 더러 있기에 이런 경우 다음 마을로 빠르게 이동하거나 비가 그칠 때까지 알베르게에 체류하는 수밖에 없어요. 급하게 뒤져본 안내 책자에 따르면 불행하게도 다음 마을 또한 우비를 살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상황이 이러면 느긋하게 하루 더 쉬고 가면 되는 것을, 그때의 저는 뭐가 그리 급했는지 날이 맑을 때 최대한 빨리 출발해야겠다고 생각하곤 바로 배낭을 싸서 나왔어요. 그런데 문을 나서려는 순간 거짓말처럼 비가 오기 시작하는 거에요. 그대로 돌이 된 저는 패닉에 빠졌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하루 더 묵었다 가야 하나? 비가 금방 그친다면 굳이 숙박까지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만일 아니라면? 내일 상점이 열기를 기다렸다가 그때 우비를 사야 할까? 식료품은 어제 다 썼는데 어쩌지?’


그런데 짜잔.

어제 제 식탁에 초대했던 캐나다 청년이 뒤에서 배낭을 메고 나오더니 하늘을 한 번 보고, 저를 한번 보고는 주섬주섬, 가방에서 우비를 꺼내더니 내미는 게 아니겠어요?!


“여기 오려고 인터넷에서 샀는데 서비스로 한 개를 껴줬더라고. 어제 진짜 너무 배고팠는데 멋진 식사를 만들어줘서 고마워.”


덕분에 까미노 후반부 내내 잘 입고 다닌 우비 (가운데가 저입니다.)

다른 날, 험난하고 힘든 길에서 거의 전우애를 다졌던 상황에서 찍은 사진.



살면서 나에게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누군가 나타나 도와주는 일은 생각보다 자주 일어나지 않죠. 


이상하게도 까미노에서는 문제가 생기면 바로 도움을 받을 수 있었어요. 그리고 도움을 주신 분과는 직전이나 그 후에 함께 음식을 먹은 기억이 있습니다.


까미노의 푸른 밀밭과 양귀비꽃

  

또 다른 어느 날, 순례자들과 나누어 먹었던 소고기 토마토 스튜와 견과류를 넣은 샐러드


그래서 까미노의 기억을 떠올리면 저는 늘 음식과 사람이 마음에 남아요. 혼자서 접시 하나만 놓고 먹을 계획이었던 식탁이 갑자기 사람과 웃음으로 꽉 차고, 모두가 서로를 도우며 행복해지는 경험. 추억은 맛으로 기억되어 그때의 기쁨을 오래오래 기억하게 해줍니다. 


반가운 사람들과 다같이 모여 식사하는 기쁨을 누리지 못한 기간이 길어져서일까요. 요즘 들어 더 자주 까미노의 맛이 생각나곤 해요.

다음 편에서도 까미노의 맛에 대한 기억을 조금 더 들려드릴게요. 

그럼 그때까지, 스보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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