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RA까미노의 맛 (2)

스보헴
2021-03-04
조회수 63


까미노는 스페인 서쪽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라는 도시를 향하는 길이에요. 순례자들은 매일 서쪽을 향해 걷습니다. 저는 까미노에서 평균적으로 20킬로를 걸었어요. 대부분의 마을이 그 정도 간격으로 자리 잡고 있고, 20킬로 이상 걸으면 무척 힘들어 일정을 다 소화할 수 없을 것 같았거든요.



 까미노(프랑스 길)의 여정. 맨 오른쪽에 조가비로 표시된 곳이 목적지인 산티아고예요.



스페인의 곡창지대 메세타 평원의 밀밭 사이를 걷고 있노라면 다음 마을이 금새 보입니다.  그런데 마을이 보이기 시작해도 보통 4~5킬로, 그러니까 최소한 한 시간 정도는 더 걸어가야 도착할 수 있어요. 대지가 편평하게 펼쳐져 있을 때엔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는 실제 거리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답니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게도, 마을이 보이지 않을 땐 길이 그닥 힘들지 않은데 일단 보이기 시작하면 갑자기 지치는 기분이 들어요. '왜 이렇게 마을이 멀지?' 싶고, 빨리 도착하고 싶어 조바심이 나기 시작합니다.



마을 입구가 보입니다. 이 정도면 정말 거의 다 온 거죠. 



미쉘 할머니를 만난 건 이 평원을 지나는 길에서였어요. 아주 나이든 할머니 한 분이 낡은 배낭을 메고 천천히 걷고 계셨죠. 걸음걸이는 힘겨워보였는데 할머니의 얼굴에는 맑은 웃음이 떠올라 있었어요. 길 한가운데 나무 그늘에 앉아 함께 쉴 때 할머니는 배낭에 매직으로 그린 달팽이 그림을 보여주셨어요.

"이 달팽이는 나야. 나는 무릎이 좋지 않아 빨리 걸을 수 없거든. 그래서 매일 내가 걸을 수 있을 만큼만 아주 천천히 걷는 거야. 달팽이처럼."



각자의 속도로 걸어야 하는 길



까미노에서는 동행이 있어도 함께 걸을 수가 없습니다.

각자의 보폭, 각자의 페이스대로 걸어야 지치거나 다치지 않을 수 있거든요. 남의 보폭, 남의 페이스에 맞추어 무리한 날은 어딘가 무척 아프답니다.

할머니와 저 역시 페이스가 다르기에 바로 옆에서 함께 걸을 수는 없었어요. 저는 할머니를  뒤로 하고 저의 속도로 저의 길을 걸었습니다.



까미노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오아시스같은 알베르게. 



그리고 며칠이 지났습니다. 그 날도 계획한 길을 다 걷고 고단한 몸을 씻은 후 알베르게에 딸린 식당에서 쉬고 있었어요. 아름다운 정원을 바라보며 바나나 초콜릿 토르테(바나나 초콜릿 케이크)을 먹고 순례길 내내 일용할 에너지 드링크였던 카페 콘 레체 (카페 라떼) 를 그란데 사이즈로 들이키며 피로를 풀고 있었죠. 그런데 미쉘 할머니가 알베르게에 느릿느릿 들어오시는 게 보이는 것 아니겠어요? 할머니의 속도는 너무 느려서 저보다 3일은 뒤쳐졌을 줄 알았는데, 할머니는 자신만의 속도로 어느새 저를 따라잡으신 거에요.



바나나 초콜릿 케이크와 사발 커피



반갑고 놀라 큰 소리로 할머니를 부르고 포옹을 나눴지요. 할머니가 제 바나나 초콜릿 케이크를 보고 눈을 반짝이며 "여기는 바나나 초콜릿 케이크도 있네!" 하고 좋아하시길래 이 알베르게에서 가장 할머니에게 필요할 것 같은 뉴스를 전해드렸습니다.

"식당에 바나나 초콜릿 케이크가 딱 한 개 남아있어요! 누가 가져가기 전에 얼른 가져오세요!"

그런데 갑자기 안된다고 하시는 거에요.

"너무 좋아하는 건데 살이 찔까봐 걱정이야. 의사가 더 이상 살 찌면 건강에 안 좋다고 했거든."

하루에 20킬로를 걸어서 왔는데 살이 찌다뇨. 까미노는 모두가 장시간의 유산소 운동으로 피골이 상접하는 길이라고요. 매일 아무것도 안 하고 고칼로리 음식만 먹는 일상이라면 모를까, 까미노에서 하루 쯤은 좋아하는 걸 먹어도 된다는 생각에 할머니에게 저도 모르게 드립을 치고 말았습니다.

"괜찮아요. 이건 케이크가 아니라 테라피에요! 순례자를 위한 테라피!"

할머니는 깔깔 웃으며 배낭을 내려놓고는 "좋아 난 오늘 케이크를 먹어야겠어! 나에게 주는 상이야!" 하고는 식당으로 달려가 (달리셨어요. 달팽이 할머니가 달리는 걸 보다니!) 케이크를 가져오셨답니다.




할머니와 함께 묵었던 아름다운 알베르게, 영상으로 느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우리는 사이좋게 앉아 케이크를 먹고 커피를 마시며 조금 더 긴 이야기를 나눴어요.

할머니는 벌써 두 번이나 까미노를 순례했고 저와 만났을 때 세번째 까미노에 올랐다고 하셨어요. 2년 전에도 왔었는데, 이제는 몸이 힘들지만 이 길을 걸을 때 너무나 행복하고 살아있음을 느끼기 때문에 오셨다고 해요. 앞으로도 육신이 허락하는 한 와볼 계획이라면서요.



다음 일정을 지나치게 걱정하며 도시락을 싸느라고 놓치고 만 템플 기사단의 웅장한 성채. 

아침에 지나가면서야 무엇을 놓쳤는지 알게 해주었어요.



까미노는 길 전체가 마치 인생에 대한 은유로 가득찬 것 같아요. 자신만의 속도로 걸어야 하는 길이지만 많은 순례자들이 그렇게 걷지 못하죠.

어떤 순례자는 자신과 싸우겠다며 '매일 40킬로씩 걷기'를 태스크로 정하고 갖은 노력을 들여 달성했지만, 저는 그 사람이 그렇게 걷는 동안 자신이 걸은 길의 풍경을 하나도 보지 못했단 걸 알았어요. 순례자들이 한 식탁에 모여앉아 지나온 마을들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사람은 그런 것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했거든요. 어떤 사람은 무리해서 일행을 따라잡으려다가 다리를 다쳐 한동안 제대로 걸을 수 없게 되기도 하고요. 어떤 사람은 다음 날 걸어가야 할 거리를 미리 걱정하고 도시락을 싸느라 오후 내내 주방에만 있다가 해가 저버려서, 머물고 있는 도시의 아름다운 성채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떠나야 하기도 해요. (이건 제 얘기에요...ㅠㅠ)

인생에서도 자신만의 속도로 자신만의 길을 만끽할 줄 아는 게 행복의 비결인 걸 알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는 건 쉽지 않다는 걸 우리 모두 알죠.  그런 의미에서 달팽이 할머니 미쉘은 까미노에서 제가 만난 사람 중 가장 용감한 사람이었어요. 바나나 초콜릿 케이크의 달콤함을 포기하지 않는 행복한 사람이기도 했고요.

오늘 많은 일을 했지만, 내일 역시 할 일은 많고 걱정거리도 많아요. 밤에 잠들기 직전까지도 생각할 것들이 넘쳐나고요. 하지만 저는 오늘 이 매거진을 쓰며 까미노의 많은 맛들 중에서도 미쉘과 먹었던 달콤함을 다시 떠올릴 수 있었고, 덕분에 제가 매몰되어 있던 고민들에서 잠시 빠져나올 수 있었어요.  내가 선택하기에 따라 행복을 누릴 기회가 늘 있다는 걸 떠올리면, 길고 긴 길이 걸을만 하게 느껴집니다. 지금 당신의 길에서는 어떤 맛이 나나요? 부디 바나나 초콜릿 케이크처럼 달콤하기를 바랄게요. 다음 매거진으로 찾아뵐 때까지, 스보헴.


 


2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