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NGJOO나의 짧았던 고전 트로트 덕질기 (2)

스보헴
2020-12-02
조회수 293




계속 이어지는 이분(남인수) 이야기(이미지출처: 벅스)


실존 인물을 좋아하다 소위 말하는 ‘탈덕’을 하는 사유는 뭐가 있을까요. 

남인수가 고인이 된지 반 세기나 지난 인물인지라 내심 방심했습니다. 자고 일어났더니 사고쳤다는 기사가 나지도 않을테고, 한 꼬집 남은 팬덤은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연령대도 아니니 팬덤싸움에 휘말릴 일도 없을테니까요. 회사일이 한참 바쁜 시기였기에 외려 이런 제한이 반가웠습니다. 쏟아지는 뉴짤에 허우적거리지 않아도 되고,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없으니 조금 외로워도 혼자 즐기면 그만이니까요. 많은 정보를 수용할 여유가 없는 직장인에겐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지요. 소비라고 해봐야 유투브에 올라온 그의 노래를 하루종일 듣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평소처럼 정열적인 구글링은 꿈도 못 꾸는 날들이었습니다. 

그래도 정말 좋았어요.
지칠 때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 피로로 버석해진 감성이 촉촉해지면서 한결 나아지는 게 느껴지는데 '이게 음악의 힘이구나'하고 혼자 감탄했죠. 보통은 어떤 인물이 마음에 들면 그날 바로 구글을 탈탈 털어보는데 남인수는 도통 그럴 여유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구글에 남인수를 검색하면 바로 1페이지에 딱 뜨는 위키피디아를 정독했을 땐 이미 한 계절이 지난 뒤였습니다. 본문 내용은 차치하고, 저의 눈길을 사로잡은 문단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백년설, 박향림과 함께 부른 〈혈서지원〉을 비롯하여 〈그대와 나〉, 〈아들의 혈서〉 등 태평양 전쟁을 지원하는 강제 동원 가요를 군국 일제에 의해 취입하였다.[2] 이러한 행적으로 인해 2008년에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음악 부문에 선정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남인수를 백년설과 함께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명시된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심의 대상자 명단에 올렸지만 대중 가수가 갖고 있던 당시의 사회적 위상이 상대적으로 낮았다는 사실이 인정되어 기각했다.[3] (출처: 위키피디아)


‘혈서지원’? 바로 검색해봤습니다.


화면출처: 한국콘텐츠 진흥원 문화콘텐츠닷컴



제목부터 이 노래가 뭔지 감이 팍 오지만 그래도 미련 한 가닥을 붙잡고 설마설마하면서 스크롤을 내려보니 가사가 이랬습니다. 



아………………….



(이미지 출처: SBS '런닝맨')



같이 부른 가수는 동시대 스타 '박향림'과 '백년설'이고 작곡·편곡자는 ‘굳세어라 금순아’, ‘신라의 달밤’, ‘낭랑 십팔세’, ‘애수의 소야곡’으로 유명한 박시춘입니다.  톱스타와 히트곡 제조기가 만나서 부른다는 노래가 하필… 



아니..

정말….



(이미지 출처: Pat a Mat (1976~2015))


할말이 없더군요. 

좀 더 찾아보니 더 환장할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남인수는 대통령령으로 발족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최종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106인'엔 들어가지 않았지만 후보엔 올랐었습니다. 그가 선정되지 않은 사유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음악·무용·야담 분야에서 17명이 결정심의 대상이 되었다. 심의를 통하여 12명의 친일반민족행위가 결정되었고, 5명이 기각되어 총 12명의 친일반민족행위가 결정되었다.
결정심의는 선정심의와 동일한 관점에서 심의를 하였는데, 특별히 대중음악의 경우 작곡, 작사, 노래를 동시 적용했는데, 이것은 대중음악의 경우 작사와 작곡, 노래는 어느 것이 보다 중요한 역할을 갖는다고 보기 어렵고, 내용이 되는 작사와 형식이 되는 작곡, 그리고 대중들에게 인지되는 가수가 각각 유기적으로 총합되어 하나의 작품을 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 작품이라 하더라도 동등한 책임을 갖는 것이라고 심의를 진행했다. 그리고 대중음악의 경우 전속 작곡가, 작사가, 가수는 어쩔 수 없는 행위로 봐야 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문제제기가 있었는데, 이 부분은 전속이라는 제도가 일정 부분 강제성을 가진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같은 시기 다른 예술 분야의 사람들에 비해 정도가 심했다고 판단되지는 않는다는 점이 논의되었다.
결정심의 중 음악에서 강문수(남인수의 본명), 김송규, 손득렬, 이창민(백년설의 본명), 무용에서 최승희가 기각되었다. 강문수와 이창민은 대중음악 가수로 「혈서지원」등 노골적인 군국가요를 부른 사실과 기타친일행위가 인정되기는 하지만, 당시 대중가수가 지니는 사회적 위상이 상대적으로 낮았다는 점이 참고되어 기각되었다.(내용출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Ⅱ, 222쪽.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저, 2009)

괄호 안의 내용은 읽는 분들이 알아보기 쉽도록 제가 임의로 넣었습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네 직업상 시키면 하는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봐줬다.”라는 내용입니다.
참고로 남인수는 해방 후에 대한레코드가수협회 회장, 한국연예협회 부이사장까지 했습니다. 군국가요를 부르고 기타 친일행위를 했지만 사회적으로 전혀 위축되지 않았단 뜻이죠. 심지어 2020년 유투브에 그의 장례행렬을 보도한 방송이 남아있을 정도이니 생전의 위상이 짐작이 갑니다.


허허허.
그저 유투브 알고리즘을 통해 좋은 가수를 알게 되어 기뻤을 뿐인데… 21세기 아이돌도 아니고 1세기 전 사람에게 이런 뒤통수를 맞다니... 대중문화의 아이콘이란 역시 시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인가… 진짜 좋아했는데… 아니 근데 이건 진짜 와… 등등등.
정말 많은 생각이 든 날이었습니다. 첫사랑도 아니고 이게 그렇게 마음을 찢을 일인가요! 가치관에 따라 누군가에겐 별일 아닌 일일 수 있겠지만 저에겐 그냥 넘어가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소태를 한움큼 삼킨 것 같은 쓴맛은 좀처럼 가시지 않네요. 만약 같은 시대를 살았다면 오히려 지금 같은 고민에서 자유로웠을까요. 과거에 살았던 인물의 행적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건 미래에 태어난 사람만의 특권이니까요.

이 사건 이후 마음이 허해진 저는 이문세와 장윤정을 다시 듣고 있습니다. 이 기회에 크리스마스 캐롤에 입덕한다면 자타공인 크리스마스 처돌이인 클라라님이 엄청 좋아하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있고요.
어쨌든, 저의 짧지만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고전 트로트 덕질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어떻게 보면 별것 아닌 일일 수 있겠지만 저에겐 2020년 4분기를 폭파시킨 대사건이었기에 이 웃지 못할 경험(?)을 공유하고 싶어서 쓰기 시작했는데 어째 결말이 흐지부지되고 말았네요^_^;;
크리스마스까지 3주 남았는데, 올해의 산타 할아버지에겐 이 허한 마음을 달래줄 새로운 콘텐츠를 달라고 졸라봐야겠습니다. 그럼 안녕!


(이미지 출처: the office(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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