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NGJOO수의사 헤리엇 이야기

스보헴
2020-12-24
조회수 114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자기만의 힐링법이 있기 마련이죠.

클라라님이 요리라면 저는 독서와 등산입니다. 자고로 독서의 매력이란 자신이 겪을 일 없는 일들을 간접체험 할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어요. 드라마나 영화에 몰입하는 것과는 또 다른 맛이 있달까요. 넷플릭스는 인터넷이 잘 안 되는 곳에선 볼 수 없지만 책은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으니 스트레스가 많을 때 도피처로 삼기에 더할나위 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아주아주 마음에 드는 책은 두 번, 세 번, 열 번 읽는데 그 중에서 일상이 팍팍할 때마다 꺼내보는 소설이 두 가지 있어요. 하나는 이영도의 ‘눈물을 마시는 새’이고 또 하나는 ‘수의사 헤리엇 이야기’시리즈입니다.

‘눈마새’야 국내 판타지계에 큰 획을 그은 작품이니 많은 분들이 아시지만 ‘수의사 헤리엇 이야기’는 전자만큼 알려지지 않았기에 이 기회를 빌어 스보헴 매거진을 읽어주시는 분들께 이 책을 추천해드리고 싶어요. 


수의사 헤리엇 시리즈 1편인 ‘이 세상의 모든 크고 작은 생물들(2016)’ 표지 (이미지 출처: 알라딘)




‘수의사 헤리엇 시리즈’는 영국 요크셔 데일스 지방 시골 마을에서 30년 넘게 수의사로 활동한 제임스 헤리엇(JAMES HERRIOT)이란 사람이 자신이 겪은 일들을 각색해 펴낸 책입니다. 1970년대에 처음 발표된 이 소설은 영미권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는데요, 몇년 뒤 BBC에서 동명의 드라마(All Creatures Great And Small(1978))가 제작되었어요. 해당 드라마는 7시즌까지 방영되고 총 시청자만 1800만명에 달했다고 하니 인기를 알만 합니다. 워낙 옛날 드라마라서 유투브에서 전 시즌 감상이 가능하니 동물 소재 힐링 콘텐츠를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꼭 한번 보셨으면 좋겠어요. 자막이 없긴 하지만 옛날 드라마라 전개도 느긋하고 연출도 클래식해서 눈치껏 봐도 내용 파악이 어렵지 않답니다. 


수의사 헤리엇 시리즈의 작가 제임스 헤리엇 
(이미지 출처: 더 텔레그래프)


BBC에서 제작한 동명의 드라마 장면 (이미지 출처: BBC)


(이제부터의 이야기는 스포일러를 조금 포함하고 있기에 원치 않으시는 분들은 스킵 부탁드립니다.)






주인공 헤리엇이 수의사가 된 1930년대는 기차, 자동차의 보급으로 수의사의 밥줄이었던 짐말의 수가 시시각각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시골은 아직까지 말이 꽤 많았지만 도시에선 어림도 없는 일이었죠. 그래서 수의사 회보 등에 구직 광고가 올라오면 경쟁률이 80대 1에 육박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이니 찬밥 더운 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던 주인공은 그 당시 기준 깡시골인 요크셔 데일스에서 면접 제안이 들어오자 뒤도 안 돌아보고 그곳으로 향합니다. 대도시 출신이다보니 요크셔에 대한 이미지라곤 ‘요크셔 푸딩’밖에 없었던 그는 도착하자마자 보이는 아름다운 경관에 면접에 대한 불안과 압박감이 씻은 듯 사라지는 체험을 하게 돼요.


소설의 배경이 되는 요크셔 데일스 지방은 지역 일부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될만큼 경관이 아름답기로 유명합니다.
(이미지 출처: sykescottages, bradtguides)



실제로 작가인 제임스 헤리엇은 자신이 커리어를 시작한 지역에 대한 애정이 깊어서, 원작과 드라마가 메가히트를 친 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소설 팬들에게 시달리면서도 동물병원을 계속 운영하고 살았다고 해요. 그가 활동했던 서스크 마을엔 그를 기리는 박물관도 있다고 하네요.


전문직 종사자들이 자신의 업무를 회고하며 쓴 책은 많지만 ‘수의사 헤리엇’ 시리즈처럼 50년 동안, 56개국에서 수천만 부가 팔린 책은 많지 않습니다. 작가 제임스 헤리엇은 수의사로서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작가로서의 재능도 아주 뛰어난 사람이었어요. 자신의 능력을 과장하지 않고 솔직담백하게 말하면서도 자신에게 고난을 안겨준 환자와 그 주인을 따뜻하고 위트 넘치는 문장으로 소개해 독자들로 하여금 마을 사람들에게 호감을 가지게 만들거든요. 


소설에 등장하는 마을 사람들은 한국의 시골 할아버지, 할머니와 매우 비슷해요. 과학보단 집안 대대로 내려져 오는 비법과 자신의 경험을 믿고, 젊은 사람은 아무 것도 모른다며 무시하기 일쑤입니다. 1권 첫장에도 주인공 헤리엇이 수의사 자격증을 딴지 7개월 밖에 안 됐다는 말에 코웃음을 치는 어르신이 나옵니다. 이런 경우가 초반에 수도 없이 발생해요. 그때마다 주인공은 울컥하지만, 고객이 정해져있는 시골에서 그들과 말싸움을 하면 이후의 영업은 끝장나는 셈이니 인내심을 발휘해 적당히 무시합니다. 정말 익숙한 래퍼토리죠? 듣기만 해도 짜증이 물씬물씬 올라오는 상황인데 이 시리즈의 매력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별 말도 안되는 민간요법이 옳다고 주장하는 어르신을 봤을 때 주인공이 느끼는 울화를 실감나게 전달하면서도 상대방이 밉지는 않게 만들어요. 

시리즈를 쭉 읽다보면 독자들은 농장주들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는 이유, 즉 자기가 기르는 가축에 대한 애정과 걱정으로 여러 번 증명된(?) 안전한 방법을 택하고 싶어하는 심리를 자연스레 알게됩니다. 전혀 다른 성향의 사람들과 속마음을 알 수 없는 동물들을 열린 마음으로 대하는 작가의 시선을 알 수 있죠. 더불어 시리즈가 진행될수록 자신들의 가축들을 위해 불철주야 뛰어다니는 주인공이 마을사람들의 신임을 얻는 게 보이기 때문에 독자들은 마치 그의 조수가 된 양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답니다. 


이 시리즈의 또 하나의 백미는 이론과 현장의 괴리와 자기 일을 사랑하는 주인공의 태도입니다. 
본문의 모든 에피소드에서 시골 수의사의 생활을 알 수 있어요. 특정 동물의 출산기가 닥치면 밤낮 없이 새끼를 받아야 한다던가, 진료비를 떼어먹으려는 동물 주인들과 입씨름을 해야 한다던가, 진통에 지친 어미소가 바닥에 주저앉아버리면 오물 범벅인 축사 바닥에 가슴을 깔고 누워서 촉진을 해야하는 등, 아주 극한직업이 따로 없습니다. 자격증과 관련된 직무를 해보신 분들이라면 주인공의 이 비명에 충분히 공감하실거에요. 


‘이런 건 책에 안 나왔다고!!!!’


네 맞습니다. 어떤 교과서도 실전에서 겪는 일을 상세히 서술해주진 않죠. 그래서 초반부에는 에피소드마다 한번 씩 거하게 멘붕하는 주인공을 볼 수 있답니다. 저도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시골 수의사가 이렇게 터프한 직업일거라곤 상상도 못했어요. 업무 강도를 생각하면 그가 받는 봉급은 결코 넉넉하다고 말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그런데도 주인공은 왜 수십 년간 이 일을 해왔을까요?


그건 아마 난산으로 어렵게 태어난 송아지가 손을 핥아줄 때, 어미와 새끼가 무사한 것을 본 덩치 큰 농장주들이 눈시울을 붉힐 때, 자신의 도움으로 죽음의 위협에서 벗어나 주인과 함께 늙어가는 동물들을 볼 때 느끼는 보람과 희열 때문일 겁니다. 각 권의 제목인 ‘이 세상의 모든 크고 작은 생물들(All Creatures Great And Small)’, ‘그들도 모두 하느님이 만들었다(The Lord God Made Them All)’, ‘이 세상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들(All Things Bright and Beautiful)’, ‘이 세상의 똘똘하고 경이로운 것들(All Things Wise and Wonderful)’ 등을 보면 저자가 동물들을 어떤 시선으로 보는지 알 수 있어요.


여기까지 읽은 스보헴의 다른 멤버들이 뭔가 감동한 에피소드를 소개해도 좋을 것 같다는 피드백을 주었지만 제가 보기엔 모든 에피소드가 다 감동적인지라 무엇을 하나 꼽기 너무 어렵네요(._.  

 

이 시리즈가 전세계적으로 사랑을 받은 대표적인 이유 또한 작가 제임스 헤리엇이 자신의 이런 애정과 보람을 독자들에게 아주 잘 전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읽다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에피소드도 여럿 있으니 읽기 전에 휴지를 꼭 준비해두세요! 

 

이 글을 쓰다보니 이 책들을 다시 읽고 싶어져서 올해 크리스마스엔 침대 옆에 향초를 켜두고 달달한 꿀 밀크티를 마시면서 이 시리즈를 정주행하려고 해요. 코로나 때문에 집콕하는 크리스마스날, 여러분도 순수한 동물들과 그들을 사랑하는 수의사 이야기를 통해 행복해지시길 바래요. 해피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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