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NGEUN푸르고 고요한 체코 숲의 추억

스보헴
2021-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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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을 좋아하세요?


어린 시절 저는 자연에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부모님과 산으로 바다로 여기저기 많이 다녔는데, 그냥 의무적으로 따라다녔을뿐 별 감흥이 없었어요. 수목원도 자주 갔었는데, 나무만 잔뜩인 곳이라 지루하고 재미없다고 생각했지요. 성인이 되어서도 비슷했어요. 프라하로 유학을 떠나기 얼마 전에 부모님과 담양의 대나무 숲을 방문했었는데, 한여름이라 숨 막히게 더웠던 기억만 남아있어요.


저는 숲이나 바다보다는 복잡한 도심의 거리를, 북적북적한 장소에서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을 좋아했어요. 프라하에 가서도 관광객이 즐비한 구시가만 쏘다녔답니다.


그러다 학교에 입학하니 오리엔테이션을 무려 7박8일로, 이름도 처음 듣는 시골로 간다고 하더라고요. 오리엔테이션 동안 진행하는 수업엔 학점도 걸려있기 때문에 절대로 빠질 수 없었죠.


'아니, 무슨 오리엔테이션을 7박 8일이나? 그것도 핸드폰 조차 잘 안 터지는 미들 오브 노웨어의 숲 속으로 간다고?'  뼛속까지 도시인간인 저는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당시 가져갔던 캐리어는 녹색 캐리어여서 튀기도 엄청 튀었었답니다...



설렘보다는 긴장과 두려움으로 가득 찬 채, 캐리어를 끌고 체코의 남부 도시 '체스케 부뎨요비체'에 도착했어요. 그곳에서 신입생들이 다 같이 모여 버스를 타고 숲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체코인 학생들은 모두 커다란 등산 배낭을 메고 있더라고요. 캐리어를 들고 탄 사람은 저뿐이었습니다. 약간의 위화감을 느끼며 버스에서 내리자 왜 모두가 배낭을 메고 있는지 깨달았어요. 버스에서 내려서 비포장 오솔길을 15분 정도 걸어야 우리가 지낼 산장이 나오는데, 캐리어를 끄는 게 불가능한 길이더라고요. 큰 소리로 덜덜거리는 캐리어를 끌다가, 낑낑거리며 들고가다가를 반복하며 드디어 산장에 도착했습니다.




여름 산장의 수영장, 사실 저 수영장에 애들이 장난으로 빠뜨리기도 하고, 수년 후에는 수영복을 챙겨가 놀기도 했지요.



블타바 강을 낀 숲에 자리한 학교 산장은 생각보다는 깔끔하고 시설이 괜찮았습니다. 핸드폰이 거의 안 터지는 대신 각종 여가시설이 준비되어 있고, 커다란 야외수영장도 있었죠. 다른 학생들은 모두 수영복을 가져와서 시간이 날 때면 수영을 했는데, 솔직히 저는 '9월 중순에 무슨 얼어 죽을 수영이냐...' 라고 생각했어요. 사실 수영도 못하고요...


동기들과 좀 친해지기 전까지는 모든 게 불편하고 힘들었어요. 캠핑과 하이킹에 익숙한 체코 아이들은 그저 신이 나있는데, 모든 것이 낯설고 외부와 고립된 숲은 그때의 저에겐 두려운 장소였어요.


 


카약 왕초보 저의 뒷모습...



숲을 두 번째 방문했을 때도 그곳은 여전히 불편한 곳이었어요. 학부생과 대학원생, 강사, 교수까지 모두 함께 가는 과 엠티를 갔을 때였어요. 저는 그곳에서 처음 카약을 탔습니다. 학생과 교수들 모두 카약을 타고, 40분간 노를 저어 강 건너 작은 마을로 갔어요.


오로지 펍 하나를 차지하고 맥주를 마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학교 산장 바에서도 맥주와 와인 및 각종 술을 파는데 대체 왜 힘겹게 블타바 강에서 카약을 타고 옆마을까지 가야하는 거지?'  그때까지도 자연과 함께하는 즐거움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저에겐 날벼락 같은 일이었죠. 어설프게 노를 젓는 저를 보고 교수님 한 분은 깔깔 웃으며 놀리기도 했답니다. 다음날 팔의 근육통은 덤이었지요.




카약을 탔던 블타바 강의 겨울이에요. 눈 쌓인게 너무 예뻐서 흑백으로 찍었어요.



불편하고 어색한 곳도 자주 가면 익숙해지기 마련이죠. 숲이 편안하게 느껴진 것은 세 번째 방문부터였어요. 한겨울이었고, 꽁꽁 언 블타바 강을 하얀 눈이 덮고 있었어요. 학생은 저를 포함해 3명. 나머지는 마임을 가르치는 교수님과 조교 1명으로, 달랑 5명이 오리엔테이션을 했던 그 산장에서 머물렀습니다. 겨울의 고요한 숲은 그 어느 때보다 안락하고 포근했어요. 얼어붙은 강가에서의 산책, 산장 요리사 아주머니가 주던 갓 구운 빵과 차, 동기가 연주하던 피아노 소리까지. 모든 것이 이제 이곳을 좋아해도 된다고 허락해 주는 것 같았어요. 바람 소리만 들리는 겨울 숲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어요. 처음으로 느꼈던 숲 속의 평화로움이었습니다.




동기 셋이 나란히 앉아 차와 간식을 먹었던 겨울의 산장 식당



봄의 산장에서 교수님들과 함께 즐거운 낮술 타임.



늦봄의 야외 포커



그 후로도 매년,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저는 그 숲을 방문했어요. 우리 과의 모든 엠티, 연기와 관련된 각종 실습수업 등이 그 숲에서 이루어졌거든요. 산장의 작은 극장에서 하루종일 영화를 보기도 하고, 연습작을 촬영하기도 하고, 또 아무것도 안 하고 빈둥대기도 하였습니다. 동기들과 숲이 보이는 산장 식당 테라스에 늘어져 천천히 맥주를 마시고, 밤에는 모닥불을 피우기도 했죠. 블타바 강에서 카약 타는 일에 익숙해지고, 산장 옆 마을의 생맥주 맛도 깨닫게 되었어요. 수많은 추억이 쌓인 숲은 이제 저에게 행복한 그리움으로 남았어요.




가을의 산장, 그 숲의 사계절을 모두 사진에 담아 왔네요.



한국으로 돌아와 스보헴을 시작하고 조향사 클라라가 숲 향을 만들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바로 이 숲을 떠올렸습니다. 키 큰 전나무와 가문비나무가 강을 부드럽게 감싸 안고 있던 숲, 언제나 다정하게 저를 맞아주었던 숲. 블루&캄이 바로 이 숲의 향기를 담고 있어요.







집 현관 앞 콘솔에는 블루&캄 디퓨저를 놓았고, 방안에는 캔들을 두었어요. 현관으로 나갈 때마다 평온한 추억을 일깨워주는 향기가 납니다. 가끔은 저녁에 캔들을 켜고 따뜻한 위로를 건네던 숲을 떠올려요. 지금은 다시 방문하기 힘들어 아쉽지만, 그 숲 덕분에 저는 다른 숲들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도 마음을 보듬어 주는 그런 숲 하나가 있으면 좋겠어요. 휴식이 필요할 때 언제나 상냥하게 반겨주는 그런 곳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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